まとめ

【REVIEW】テキストとテクスチャー:パープルーム《パープルタウンでパープリスム》における教育的なものについて / 텍스트와 텍스처: 파프룸 <파플타운에서 파플리슴>에서 교육적인 것들에 대하여

텍스트와 텍스처: 파프룸 <파플타운에서 파플리슴>에서 교육적인 것들에 대하여

대부분의 경우 시각에 의존하는 미술전시에서 청각이 자리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거의 의아해하는 일 없을 정도로 오늘날 관람객은 영상작업을 보는데 그때마다 헤드셋을 끼거나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이러한 기술적인 발전을 따라 예술작품에 시각과 다른 청각이라는 감각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 감상의 차원에서 한 가지 더 특기할 만한 상황이 바로 도슨트이다. 서울의 많은 미술관에서 정해진 시간에 도슨트 투어가 열리는데, 이때 작품‘을’ 감상한다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지식이 청각적으로 우리에게 주입된다. 그 지식이 감상에 도움이 전혀 안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지식은 감상의 폭을 (선제하여) 축소시켜버린다. 그 자리에서 지식이 앞서면 감상은 키워드나 이미 나온 해석으로 쉽게 ‘묶여져’ 거기서 벗어나오기 어렵다.

이러한 교육적인 태도 아래에서 전개되는 감상방식은 비단 도슨트 투어뿐만 아니다. 어떤 작품을 설명문을 통해 볼 때,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캡션이 달린) 사진에서 무엇이 진실로 전달되는가에 대한 질문(사진의 작은 역사)은, 오늘날 설명문 형태로 나온 지식을 통해 감상이 유도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즉 작품을 실제로 안 봐도 작품을 본 것처럼 전달되는 정보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미술관에 작품을 보러 가는 것일까, 아니면 작품의 설명을 읽으러 혹은 들으러 가는 것일까? 전시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작품에 ‘대한’ 교육적 태도―도슨트 투어나 텍스트 설명은 가끔 (실패한) 마법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그 정보가 뻔한 주례사처럼 작품을 추켜세우는 혹은 더 넓은 해석을 아예 제한시킨다는 양극단의 측면이 있다. 두 특징을 공통적으로 연결해주는 것이 돗자리를 아주 넓게 깔아서 혹은 작품을 협소하게 바라보고 ‘묶어버리는’ 지식이다. 전시라는 실제 공간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 관객들은 얼마나 감상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파플타운에서 파플리슴>은 생활공간에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큐레이션을 통해 감상의 ‘방식’을 가시화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텍스트에 있다고 본다.

이번에 파프룸예비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시 <파플타운에서 파플리슴>에서 관객은 일종의 투어에 참여한다. 총 6개 공간을 파프룸 예비학교 학생(그외 참여작가, 총괄자)의 안내를 통해 같이 가서 작품을 본다. 6개 공간은 모두 화이트큐브가 아니라 사적 공간인데 그 중의 절반은 파프룸 예비학교라는 공간 일대이며 작가 우메츠 요이치(梅津庸一 Umetsu Yoichi)가 운영하는 미술학원과 같은 교육기관이자 작업실이다. 나머지는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각각 생활하는 아파트의 일인실을 전시장으로 바꾸어 세 공간에서 열렸다. 관람자는 예비학생의 말을 들으면서 투어에 참여하여 코스를 따라 각 공간을 돌아본다. 애초에 파프룸 예비학교가 자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이번 투어는 사적 공간에서 보는 전시라는 인상이 전반적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전반성은 공간마다 어느 정도의 차이를 둔다. 예컨대 예비학교 공간은 내부(예비학생)/외부 작가의 작업을 공간 곳곳에 배치하는데 반해, 원래 학교 작업실이던 공간은 전시공간에 더 가깝게 구성되었다. 대조적으로 옆에 있는 예비학교 옆의 빌라 2층에 있는 ‘파프룸의 전망대 오두막집’(여기도 방이다)에서 작품은 생활 속에 침투되어 있는데 디자인에 가까운 또는 인테리어 오브제처럼 기능하는 작업들이 있다.

한편 다른 아파트 일인실에 들어가서 전시를 보게 될 때, 파프룸 공간과 다른 인상을 느끼는데, 사적 공간을 (말그대로) 점유하는 큐레이션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아파트 세 공간마다 차이는 있지만 파프룸 공간의 경우, 작품의 속성 때문에 생활공간 안에서 작품이 조화롭게 보인다면, 후자의 경우 저 좁은 공간에 큰 조형물이 들어가 비-조화로 비춰지기도 하다. 색칠된 침대를 놓고, 작업을 배치시키고, 좁은 공간에 거의 누울 수 없는 정도로 전시와 생활의 무게 균형이 전자에 쏠려 있다. 이런 연출이 작업에 대한 시선을 유도를 하는데 파프룸 공간과 아파트 일인실은 생활환경과 전시 사이의 무게중심이 각각 다르게 적용된다. 즉 전자는 작품과 환경과 조화를 이룬 작업, 그리고 후자는 이미 전시장이 되어버린 공간으로 나타난다.

큐레이팅에 따른 이러한 동화과정은 전시과정에 개입된 폭력으로도 쉽게 읽히는데, 이를테면 “예술작품은 인테리어 아니야!”는 식, 혹은 “거기는 우리 집이야!”는 식의 반론제기가 가능하다. 그런데 오히려 이번 전시는 이런 반론 혹은 문제 제기를 6개 공간에서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보여준다. 요컨대 어떤 공간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폭력적인 기획 태도가 그렇게 안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 반대는 왜인지에 대한 물음을 공간 곳곳에 붙여진 텍스트들을 통해 부각시켜준다. 예컨대 파프룸 예비학교에서 작품들은 짤막한 텍스트의 도움을 받고 “아, 이게 작품이구나”하는 관람객의 시선을 유도하고, 반대로 아파트 일인실에서 “하긴 여기가 집이었지”하는 생각이 들게 거리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화상태에서 전자의 경우는 작품과 생활환경,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생활환경과 전시장 사이를 가시화시켜준다.

“현명한 당신이 엮어내는 미술사를 방해하는 일”

 

[증기의 엉/킴]

 

이런 양쪽 무게 중심의 변화는 설명(문)과 텍스트의 차이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감상방식에서 설명은 가리키는 대상이 특정적이고 주어진 부분만 작품을 보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 익숙함에서 살짝 발을 물러서게 만드는, 그러니까 인테리어나 전시의 형태로 익숙하게 보이는 장면에 거리를 확보하는 장치가 바로 텍스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프룸과 아파트 일인실은 공간의 분위기도 다르지만 익숙함에 묶이는, 즉 배경과 동화되는 작품과 바탕이 되어버리는 전시장에 낯섦(uncanny)을 끌고 들어온다. 방 안에 A4용지에 적힌 [꺼림직/한 광경]은 전시장으로 만들어버린 공간에 대한 시선으로, [거 주]라는 말은 전시장이 사실 세팅된 사실로, 그리고 원래 공간에 대한 생각으로 유도한다.

이런 장치는 천에 쓰여진 ‘현명한 당신이 엮어내는 미술사를 방해하는 일’이라는 문장을 통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언급되는데, 천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적 선언을 연상시키고 반대로 A4용지에 출력된 짤막한 글이나 단어는 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양자는 서로 대치되는데 후자인 시적 텍스트는 미술사를 방해하는 장치로서 존재하며, 이는 역사를 다시 엮어내는 가능성, 즉 이미 기록된 선형적 흐름을 재배치하는 시도라 볼 수 있다. 이런 재배치의 가능성을 지식이 아니라 감상의 차원에서 이끌었던 것이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그것은 다시 벤야민을 경유하여 참조하면 (또 우메츠 본인이 이야기하듯) 별자리-배치(konstellation)로서 제시되는 전시이다. 즉 지식이나 설명의 축적이 아닌, 감상의 차원에서 끄집어내어 연결하는 시도를 선사한다. (그러기에 우메츠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볻한다>에 본인이 작정한 대로 다른 그림이 하나 더 추가되어 보여졌다면 미술사를 다시 엮어내는 주장에 더 힘을 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비학교에 붙어 있던 텍스트 [증기의 엉/킴]은 식물의 엉킴과 전시 전반성의 엉킴을 짚어준다. 그것은 감상으로 이끄는 장치로서, 증기처럼 흩어진 것들을 다시 엮게끔 관람자에게 선사한다.

여기서 텍스트들은 감상을 향한 텍스처(texture) 역할을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전시를 볼 때 짜임새를 만드는 장치로서 텍스트들은 그 공간 안에서 무게중심을 부여하는데, 텍스트들의 시적 성격 때문에 이 무게중심은 관람자마다 다르게 배치된다. 이 재/배치의 방식, 그러니까 설명이나 지식으로 묶인 것을 풀어주되 텍스트는 다시 엮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와 같은 텍스트 역할을 통해, 와키모토 사키(わきもとさき) 예비학생의 방은 단순히 ‘전시’가 아닌, 어떤 점에서 전시라 불리며 어떤 점에서 그렇지 않는지 다시 확인해볼 수 있다. 방 안에 전시 무대가 들어서면서 생기는 위화감은 마치 초현실주의자들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처럼 느껴지는데, 사적인 공간과 전시장의 결합은 (로트레아몽의 시의 일부인) ‘수술대 위의 재봉틀과 박쥐우산’처럼 관람자와 거리를 만들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전시장과 사적 공간의 이러한 (실제적 혹은 뉘앙스적) 거리감은 [거 주(居 住)]라는 텍스트를 통해 확보된다. 따라서 그 텍스트를 보고 나면, 세탁기와 전기밥솥의 만남은 아름다움으로 흡수되지 않고 권력행사의 결과로 인식되어 애초에 그 공간이 전시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전시장과 함께 보여준다. 이 공간을 점유한 전시-하기 때문에 이 장면은 단지 심미적인 마주침보다는 큐레이팅 때문에 생활환경에 조작이 가해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거리두기를 바탕으로 해서 전시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감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번에 찾아간 공간들은 원래부터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예비학생이 각각 쓰는 아파트 일인실 또한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와키모토 학생의 공간은 ‘파프룸 1와 3/4’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투어를 하면서 본인은 어떤 의미도 없다고(없을거라고) 했는데 ‘1와 3/4’는 어쩌면 이번 전시의 감상방식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1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1/4은 과연 채울 수 있을까? 남은 부분이 채워질 때 1와 완전 똑같을 수 있을까? 이번 전시는 그 남은 1/4를 관람객에게 요한다고도 볼 수 있다. 글이 아닌 텍스트는 감상방식에서 작품 혹은 공간을 다시 묶어주게 만든다. 그런데 사실 이런 텍스트들이 단지 “이야~ 아름다운 시 같군!”으로 심플하게 문장으로만 소비돼버리는 우려 또한 존재한다. 이를 방지하는 데에 말로 어느 정도 방향조절을 하는 투어라는 형식이 이번엔 잘 맞았으나, 과연 전시의 결과물로만 내보내어질 때, 감상자는 어느 만큼 심미와 교육적 태도(줄글 설명이나 도슨트 투어의 지식)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감상에 끌고올 수 있을지, 이것은 전시(/기획자)의 과제이자 동시에 관람객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콘노 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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